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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지 성관스님 작성일2026.03.23 조회295회 댓글0건본문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집성제(集聖諦) -1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한다.”
“이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有求有苦 (유구유고)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구하지 않으면 괴로움도 없다.”
괴로움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백화점에 걸린 모피코트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보고
“저걸 꼭 사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
가격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저건 생명을 해쳐서 만든 것”이라 여겨
조금도 갖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같은 물건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괴롭고, 한 사람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건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마음이 문제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괴로움의 뿌리를 갈애(渴愛)라고 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오직 물만 생각하듯이,
우리 마음도 어떤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만 붙잡고 놓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붙잡고 있습니까?
바로 명색(名色)입니다.
이름과 모양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이 꽃은 예쁘다.”
“저 사람은 싫다.”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
그런데 그 ‘예쁨’이
꽃 안에 본래 들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 마음이 그렇게 붙인 것입니까?
제가 예전에 봉암사 선원에서 동안거를 지낼 때의 일입니다.
절에서는 오줌을 큰 통에 모아두었다가
제약회사에서 가져갔습니다.
우리는 보통오줌을 더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그것이 약의 원료가 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오줌이 본래 더러운 것입니까?
본래 귀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과 인식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분별은 내가 만든 것입니다.
좋다 / 싫다
귀하다 / 천하다
옳다 / 그르다
이 모든 것은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붙여놓은 이름과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진짜라고 착각하고
다시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 근본은 무명(無明)입니다.
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길에서 노끈을 밟고
뱀인 줄 알고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불을 밝혀 보면 그저 노끈입니다.
그 순간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돌아보십시오
“가지고 싶은데 못 가진 것”
“싫은데 피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영원합니까?
변하지 않습니까?
모두 무상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결국 이것입니다.
괴로움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진짜라고 믿고 붙잡는 마음” 때문입니다.
괴로움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화가 날 때
“왜 화가 나는가”를 보고,
괴로울 때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를 보고,
미워할 때
“내 마음이 먼저 타고 있구나”를 아는 공부이고 깨달아야 할 대상입니다.
괴로움이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나를 깨우치러 온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보는 순간, 괴로움은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라 지혜로 바뀝니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겠다는
깊은 발심(發心)의 인연으로 삼는다면
그 길 끝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맑고 고요한 자리,
바로 여러분 안의 참마음 진실한
나를 만나게 될것입니다.










집성제(集聖諦) -1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한다.”
“이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有求有苦 (유구유고)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구하지 않으면 괴로움도 없다.”
괴로움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백화점에 걸린 모피코트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보고
“저걸 꼭 사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
가격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저건 생명을 해쳐서 만든 것”이라 여겨
조금도 갖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같은 물건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괴롭고, 한 사람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건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마음이 문제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괴로움의 뿌리를 갈애(渴愛)라고 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오직 물만 생각하듯이,
우리 마음도 어떤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만 붙잡고 놓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붙잡고 있습니까?
바로 명색(名色)입니다.
이름과 모양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이 꽃은 예쁘다.”
“저 사람은 싫다.”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
그런데 그 ‘예쁨’이
꽃 안에 본래 들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 마음이 그렇게 붙인 것입니까?
제가 예전에 봉암사 선원에서 동안거를 지낼 때의 일입니다.
절에서는 오줌을 큰 통에 모아두었다가
제약회사에서 가져갔습니다.
우리는 보통오줌을 더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그것이 약의 원료가 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오줌이 본래 더러운 것입니까?
본래 귀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과 인식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분별은 내가 만든 것입니다.
좋다 / 싫다
귀하다 / 천하다
옳다 / 그르다
이 모든 것은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붙여놓은 이름과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진짜라고 착각하고
다시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 근본은 무명(無明)입니다.
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길에서 노끈을 밟고
뱀인 줄 알고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불을 밝혀 보면 그저 노끈입니다.
그 순간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돌아보십시오
“가지고 싶은데 못 가진 것”
“싫은데 피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영원합니까?
변하지 않습니까?
모두 무상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결국 이것입니다.
괴로움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진짜라고 믿고 붙잡는 마음” 때문입니다.
괴로움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화가 날 때
“왜 화가 나는가”를 보고,
괴로울 때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를 보고,
미워할 때
“내 마음이 먼저 타고 있구나”를 아는 공부이고 깨달아야 할 대상입니다.
괴로움이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나를 깨우치러 온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보는 순간, 괴로움은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라 지혜로 바뀝니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겠다는
깊은 발심(發心)의 인연으로 삼는다면
그 길 끝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맑고 고요한 자리,
바로 여러분 안의 참마음 진실한
나를 만나게 될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