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밴드글 (20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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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지 성관스님 작성일2024.12.02 조회224회 댓글0건본문
음력11월 초하루 법문
걸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가을을 느껴볼 사이도 없이 찬 바람이 붑니다.
스님도 겨울 두꺼운 누비옷들을 꺼내놔야겠습니다.
옷이 두툼해지는 것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낍니다.
오늘은‘걸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는 주제로 법문을 해드리겠습니다.
누군를 초면에 만나면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건넵니다.
“저는 어디(동네, 아파트) 사는 누구(이름)입니다.”
“저는 어디서(직장) 근무하는 누구(이름)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누구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그 소개말을 듣고 그 사람을 이제 안다고 하는 사람이나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사는 동네나 아파트도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직장이나 직책도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아닐 터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누구라고 소개하고 또 소개받습니다.
나의 이름이 내가 아니듯
내가 사는 동네나 아파트
내가 다니는 직장이나 직책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내가 입고 들고 있는 옷
혹은 나의 종교나 신념
이러한 것들은 나를 치장하며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것들은
분명 내가 아닙니다.
국민적인 공분을 샀던 일들을 예로 들어봅니다.
가던 비행기를 돌려세운 땅콩회향 사건이나
아버지 뻘 경비원을 폭행하고
모욕해서 자살하게 만든 일이나
백화점 여직원을 땅바닥에 무릅을 꿇리고 욕하고
운전기사를 두들겨 패거나
옆 동네 못사는 임대아파트 아이들
자기 아파트 놀이터에 들어오지 못하게
팬스를 쳤다는 이런 일들을
심심치 않게 뉴스 기사로 접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걸치고 있는 것들을
나와 동일시(同一視) 하기에 벌어지는 모습들입니다.
내가 믿는 종교신념이나 정치성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내가 아닌 것들을 나로 착각하고 있기에 그것들이 부정당하거나 나와 생각이 다른 의견을 내비추면 이것은 바로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겨서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적으로 돌립니다.
<반야심경>의 말씀에
‘오온개공(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오온(五蘊)인 다섯 무더기 즉 몸(색)과 느낌(수)과 생각(상) 욕망(행) 알음알이(식)도
역시 내가 걸치고 있는 것일 뿐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밝다면 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변하는 것들...
이 몸(色)은 내가 아님에 밝다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나의 느낌(受)도 내가 아님에 밝다면
집착하지 않고 다만 경험할 뿐입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나의 생각(想)도 내가 아님에 밝다면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음도 허용합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나의 욕망(行)도 내가 아님에 밝다면
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내가 안다(識)는 생각 역시 내가 아님에 밝다면
교만하여 다른 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잠시 인연하여 내가 걸치고 있는 것들이
내가 아닌 줄 분명히 아는 지혜가 밝아서
그것들에 사로잡히거나 메이지 말고
인연에 따라 언제든지
계절이나 장소에 따라 알맞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처럼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걸림 없이 자유자재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즉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어서
착각하고 있는 허망한 생각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무엇이 나입니까?
온갖 걸치고 있는 이러한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진실한 나의 본래면목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대상 경계이지 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기에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라
양무제를 만난 달마대사는
당신은 누구냐는 물음에
“모른다(不識)”고 답했고,
<금강경오가해>에서는
“옛 부처 나기 전
(古佛未生前)
변함없이 한바탕으로 원만한 이 자리
(凝然一相圓)
석가도 오히려 알지못했거늘
(釋迦猶不會)
가섭이 어찌 전했으리오
(迦葉豈能傳)”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뭣 고 ?
(말없이 잠시 있다가)
팔을 뻗어 허공에
한 일(一)자를 하나 그어 보이겠습니다.
내마음 관세음
날마다 좋은날 ^^
마곡사 단풍만 이쁜줄 알았는데 우리 계룡산 신원사 사천왕문 주변의 단풍은 더 곱습니다. ㅎ
차를 타고 휭하니 왔다가 가시면 놓치는 귀한 가을 풍경입니다. 기도후에 찬찬히 도량을 거닐며 마지막 안감힘쓰며 붉게 자태를 뽐내는 남은 가을도 느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걸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가을을 느껴볼 사이도 없이 찬 바람이 붑니다.
스님도 겨울 두꺼운 누비옷들을 꺼내놔야겠습니다.
옷이 두툼해지는 것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낍니다.
오늘은‘걸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는 주제로 법문을 해드리겠습니다.
누군를 초면에 만나면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건넵니다.
“저는 어디(동네, 아파트) 사는 누구(이름)입니다.”
“저는 어디서(직장) 근무하는 누구(이름)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누구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그 소개말을 듣고 그 사람을 이제 안다고 하는 사람이나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사는 동네나 아파트도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직장이나 직책도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아닐 터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누구라고 소개하고 또 소개받습니다.
나의 이름이 내가 아니듯
내가 사는 동네나 아파트
내가 다니는 직장이나 직책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내가 입고 들고 있는 옷
혹은 나의 종교나 신념
이러한 것들은 나를 치장하며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것들은
분명 내가 아닙니다.
국민적인 공분을 샀던 일들을 예로 들어봅니다.
가던 비행기를 돌려세운 땅콩회향 사건이나
아버지 뻘 경비원을 폭행하고
모욕해서 자살하게 만든 일이나
백화점 여직원을 땅바닥에 무릅을 꿇리고 욕하고
운전기사를 두들겨 패거나
옆 동네 못사는 임대아파트 아이들
자기 아파트 놀이터에 들어오지 못하게
팬스를 쳤다는 이런 일들을
심심치 않게 뉴스 기사로 접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걸치고 있는 것들을
나와 동일시(同一視) 하기에 벌어지는 모습들입니다.
내가 믿는 종교신념이나 정치성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내가 아닌 것들을 나로 착각하고 있기에 그것들이 부정당하거나 나와 생각이 다른 의견을 내비추면 이것은 바로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겨서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적으로 돌립니다.
<반야심경>의 말씀에
‘오온개공(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오온(五蘊)인 다섯 무더기 즉 몸(색)과 느낌(수)과 생각(상) 욕망(행) 알음알이(식)도
역시 내가 걸치고 있는 것일 뿐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밝다면 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변하는 것들...
이 몸(色)은 내가 아님에 밝다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나의 느낌(受)도 내가 아님에 밝다면
집착하지 않고 다만 경험할 뿐입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나의 생각(想)도 내가 아님에 밝다면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음도 허용합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나의 욕망(行)도 내가 아님에 밝다면
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잠시 인연하여 걸치고 있는
내가 안다(識)는 생각 역시 내가 아님에 밝다면
교만하여 다른 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잠시 인연하여 내가 걸치고 있는 것들이
내가 아닌 줄 분명히 아는 지혜가 밝아서
그것들에 사로잡히거나 메이지 말고
인연에 따라 언제든지
계절이나 장소에 따라 알맞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처럼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걸림 없이 자유자재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즉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어서
착각하고 있는 허망한 생각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무엇이 나입니까?
온갖 걸치고 있는 이러한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진실한 나의 본래면목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대상 경계이지 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기에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라
양무제를 만난 달마대사는
당신은 누구냐는 물음에
“모른다(不識)”고 답했고,
<금강경오가해>에서는
“옛 부처 나기 전
(古佛未生前)
변함없이 한바탕으로 원만한 이 자리
(凝然一相圓)
석가도 오히려 알지못했거늘
(釋迦猶不會)
가섭이 어찌 전했으리오
(迦葉豈能傳)”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뭣 고 ?
(말없이 잠시 있다가)
팔을 뻗어 허공에
한 일(一)자를 하나 그어 보이겠습니다.
내마음 관세음
날마다 좋은날 ^^
마곡사 단풍만 이쁜줄 알았는데 우리 계룡산 신원사 사천왕문 주변의 단풍은 더 곱습니다. ㅎ
차를 타고 휭하니 왔다가 가시면 놓치는 귀한 가을 풍경입니다. 기도후에 찬찬히 도량을 거닐며 마지막 안감힘쓰며 붉게 자태를 뽐내는 남은 가을도 느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