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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지 성관스님 작성일2024.09.30 조회304회 댓글0건본문
마음공부 법성게
5.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然成)
참 마음 성품은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여
자기 성품 고집 않고 인연 따라 나투우네.
참 마음 성품 자리는 너무도 미묘하기에
어떤 독립된 성품을 갖추지 않고
인연따라 드러냅니다.
좀 오래된 노래인데 ㅎ 시인과 촌장의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다는 말이 깊이 각인됩니다.
여러분도 누구의 부인으로 어머니로 그리고 딸로 봉사단체에서는 회장님으로 절에서는 보살님으로 또는 불교대학 학생으로 또는 선배로 후배로 .... 인연따라서 수 없는 많은 이름과 그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해내고 계신 모습을 보면 이것이 바로 무한한 신통을 쓰고 계신 것입니다.
그 모든 나의 하나의 근본 자리인 참 마음 본성은 이토록 미묘해서[진성심심극미묘] 어떤 고정되어 정해진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이 [불수자성] 인연에 따라 그 모양을 수없이 나투어 작용하고 있음[수연성]을 말합니다. 참 마음 성품은 인연에 따른 작용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으면 알수가 없기에 미묘합니다.
만약 자체의 독립적인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분명한 실체가 있어서 내가 저기의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는 저 대상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그 대상들은 따로 따로 실체하는 존재로서 그렇게 주와 객이 분리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의심없이 당연히 그리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를 가정합시다.
보이는 대상만 있고 보는 내가 없으면 무엇을 본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반대로 보는 나만 있고 보이는 그 대상이 없다면 무엇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보고 또 보이는 주객이 둘로 떨어져 있지 않을 때 비로소 본다 할 수 있다면 그 둘은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지할 때만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자체의 독립적인 나[무엇]라고 하는 성품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무엇]이라고 하는 정해진 실체가 없기에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마치 거울 바탕위에 비친 물체와 거울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둘은 의지하는 것이기에 자체의 성품이 없으며[불수자성] 그래서 인연따라 마음 거울 바탕에 생기고 사라집니다[수연성].
이것을 수연무작(隨緣無作)이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참 나라고 하는 이 마음은 인연을 따라 온갖 모양을 드러내지만 조작됨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물은 그릇에 따라 이런 저런 모양을 나타내고, 또 온도가 차면 굳어 단단해지는 성질로 변해 고정된 형태를 갖추기도 하고, 또는 끓어 올라 수증기로 사방에 흩어지기도 하고, 바람을 따라 뭉쳤다가 인연따라 비로 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흘러가면서 굽은 곳은 굽게 가고 경사진 곳은 빠르게 가고 완만한 곳을 만나면 천천히 움직이며 흘러갑니다.
물의 비유와 같이 인연을 따라 걸림없이 아무런 조작이 없는 이 바탕 자리가 우리가 본래부터 항상 갖추고 있었던 미묘한 성품자리입니다.
이 원만한 성품을 이미 갖추고 늘 쓰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무엇을 어떻게 더 구할것 없이 다만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삼독심이 올라올때 마다 순간 순간 진심으로 참회하면서 물들지 않토록 한다면 날마다 관세음의 자비로 가득한 날마다 좋은날이 될 것입니다.
내마음 관세음
날마다 좋은날 ^^



5.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然成)
참 마음 성품은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여
자기 성품 고집 않고 인연 따라 나투우네.
참 마음 성품 자리는 너무도 미묘하기에
어떤 독립된 성품을 갖추지 않고
인연따라 드러냅니다.
좀 오래된 노래인데 ㅎ 시인과 촌장의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다는 말이 깊이 각인됩니다.
여러분도 누구의 부인으로 어머니로 그리고 딸로 봉사단체에서는 회장님으로 절에서는 보살님으로 또는 불교대학 학생으로 또는 선배로 후배로 .... 인연따라서 수 없는 많은 이름과 그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해내고 계신 모습을 보면 이것이 바로 무한한 신통을 쓰고 계신 것입니다.
그 모든 나의 하나의 근본 자리인 참 마음 본성은 이토록 미묘해서[진성심심극미묘] 어떤 고정되어 정해진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이 [불수자성] 인연에 따라 그 모양을 수없이 나투어 작용하고 있음[수연성]을 말합니다. 참 마음 성품은 인연에 따른 작용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으면 알수가 없기에 미묘합니다.
만약 자체의 독립적인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분명한 실체가 있어서 내가 저기의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는 저 대상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그 대상들은 따로 따로 실체하는 존재로서 그렇게 주와 객이 분리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의심없이 당연히 그리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를 가정합시다.
보이는 대상만 있고 보는 내가 없으면 무엇을 본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반대로 보는 나만 있고 보이는 그 대상이 없다면 무엇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보고 또 보이는 주객이 둘로 떨어져 있지 않을 때 비로소 본다 할 수 있다면 그 둘은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지할 때만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자체의 독립적인 나[무엇]라고 하는 성품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무엇]이라고 하는 정해진 실체가 없기에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마치 거울 바탕위에 비친 물체와 거울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둘은 의지하는 것이기에 자체의 성품이 없으며[불수자성] 그래서 인연따라 마음 거울 바탕에 생기고 사라집니다[수연성].
이것을 수연무작(隨緣無作)이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참 나라고 하는 이 마음은 인연을 따라 온갖 모양을 드러내지만 조작됨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물은 그릇에 따라 이런 저런 모양을 나타내고, 또 온도가 차면 굳어 단단해지는 성질로 변해 고정된 형태를 갖추기도 하고, 또는 끓어 올라 수증기로 사방에 흩어지기도 하고, 바람을 따라 뭉쳤다가 인연따라 비로 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흘러가면서 굽은 곳은 굽게 가고 경사진 곳은 빠르게 가고 완만한 곳을 만나면 천천히 움직이며 흘러갑니다.
물의 비유와 같이 인연을 따라 걸림없이 아무런 조작이 없는 이 바탕 자리가 우리가 본래부터 항상 갖추고 있었던 미묘한 성품자리입니다.
이 원만한 성품을 이미 갖추고 늘 쓰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무엇을 어떻게 더 구할것 없이 다만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삼독심이 올라올때 마다 순간 순간 진심으로 참회하면서 물들지 않토록 한다면 날마다 관세음의 자비로 가득한 날마다 좋은날이 될 것입니다.
내마음 관세음
날마다 좋은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