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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지 성관스님 작성일2026.05.20 조회297회 댓글0건본문
진정한 행복을 찾아서
멸성제(滅聖諦) - 11
참마음의 근본 바탕과 그 작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비유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가위’ 모양을 만들면
그 순간 그 모양에 ‘가위’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그리고 ‘자른다’는 개념이 생기고,
주먹에는 지고 보자기에는 이긴다는 관계와 가치도 생겨납니다.
주먹을 쥐어 ‘바위’라는 모양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단하다, 강하다는 의미가 붙고,
보자기를 이기고 가위에는 진다는 관계가 생깁니다.
손을 펴서 ‘보’라는 모양을 만들 때 역시
그 모습에 이름과 역할과 가치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가위도, 바위도, 보도
본래는 모두 같은 손 하나의 일입니다.
손 자체에는 가위도 없고 바위도 없고 보도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끊임없이 없다는 무(無)을 내세워 반복하는 도리와 같은 뜻입니다.
다만 모양을 취하는 순간
이름이 붙고,
개념이 생기고,
서로 비교하는 가치와 분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양과 이름을 따라가며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하면서
끊임없이 세상을 나누고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 분별 속에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어지며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드러난 모양과 이름을 따라가지 않고,
그 모든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본래 아무 일 없는 참마음 본바탕자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위와 바위와 보가
본래 한 손의 일이듯이,
세상의 모든 모습과 소리와 생각과 감정 또한 서로 달라 보이지만 실상은 모두 참마음 거울 한바탕에 드러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드러난 모양과 이름을 붙잡고
그것들이 서로 따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비교하여 집착하고 또는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마음의 감옥을 만들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참마음의 자리에서 보면
좋고 싫음도, 옳고 그름도
모두 인연 따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파도가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바다는 그 깊은 바탕이 흔들리지 않듯이,
하늘에 해가 뜨고 지며
밤과 낮이 끊임없이 바뀌어도
허공 자체가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생각과 감정과 오감의 수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참마음 이 진실한 거울 본바탕은 본래 아무 일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자리를 어느 한 분별에도 치우치지 않는다고 하여 중도(中道)라 말하고,
허공처럼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공(空)이라고도 말합니다.
허망한 분별의 꿈에서 깨어나
우리 스스로를 묶고 있던 집착의 끈을 놓아버릴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며
괴로움이 소멸하는 길이라 하여
멸성제(滅聖諦)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멸성제(滅聖諦) - 11
참마음의 근본 바탕과 그 작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비유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가위’ 모양을 만들면
그 순간 그 모양에 ‘가위’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그리고 ‘자른다’는 개념이 생기고,
주먹에는 지고 보자기에는 이긴다는 관계와 가치도 생겨납니다.
주먹을 쥐어 ‘바위’라는 모양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단하다, 강하다는 의미가 붙고,
보자기를 이기고 가위에는 진다는 관계가 생깁니다.
손을 펴서 ‘보’라는 모양을 만들 때 역시
그 모습에 이름과 역할과 가치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가위도, 바위도, 보도
본래는 모두 같은 손 하나의 일입니다.
손 자체에는 가위도 없고 바위도 없고 보도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끊임없이 없다는 무(無)을 내세워 반복하는 도리와 같은 뜻입니다.
다만 모양을 취하는 순간
이름이 붙고,
개념이 생기고,
서로 비교하는 가치와 분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양과 이름을 따라가며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하면서
끊임없이 세상을 나누고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 분별 속에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어지며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드러난 모양과 이름을 따라가지 않고,
그 모든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본래 아무 일 없는 참마음 본바탕자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위와 바위와 보가
본래 한 손의 일이듯이,
세상의 모든 모습과 소리와 생각과 감정 또한 서로 달라 보이지만 실상은 모두 참마음 거울 한바탕에 드러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드러난 모양과 이름을 붙잡고
그것들이 서로 따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비교하여 집착하고 또는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마음의 감옥을 만들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참마음의 자리에서 보면
좋고 싫음도, 옳고 그름도
모두 인연 따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파도가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바다는 그 깊은 바탕이 흔들리지 않듯이,
하늘에 해가 뜨고 지며
밤과 낮이 끊임없이 바뀌어도
허공 자체가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생각과 감정과 오감의 수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참마음 이 진실한 거울 본바탕은 본래 아무 일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자리를 어느 한 분별에도 치우치지 않는다고 하여 중도(中道)라 말하고,
허공처럼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공(空)이라고도 말합니다.
허망한 분별의 꿈에서 깨어나
우리 스스로를 묶고 있던 집착의 끈을 놓아버릴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며
괴로움이 소멸하는 길이라 하여
멸성제(滅聖諦)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