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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지 성관스님 작성일2026.05.08 조회287회 댓글0건본문
진정한 행복을 찾아서
멸성제(滅聖諦) 6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은 사실 ‘마음’이라는 거울 위에 잠시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그림자를 실재라 믿으며, 평생 그것을 붙잡기 위해 목을 축이지 못한 채 사막을 헤매는 이들처럼 살아갑니다.
‘좋다와 싫다’, ‘옳다와 그르다’라는 감옥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창살 틈으로 보이는 허상을 실재라 믿으며 고통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선원에서 사용하는 죽비 하나를 보십시오. 누군가는 그것을 거룩한 법구로 받들어 모시고, 누군가는 그저 흔한 관광지의 안마기로 여깁니다. 귀하고 천한 성질이 죽비 속에 본래부터 새겨져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죽비는 아무일 없습니다. 그 위에 ‘귀함’과 ‘천함’이라는 낙인을 찍어 우리를 갈등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우리의 분별심입니다.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도,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알레르기의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예쁘고 못남, 좋고 싫음은 꽃의 본질이 아니라, 갈증에 허덕이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입니다.
밝음과 어둠, 동쪽과 서쪽이라는 경계는 또 얼마나 견고한 집착입니까. 우리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실체라 믿지만, 사실 어둠이 물러나야 빛이 드러나고 서쪽이 있어야 동쪽이 성립됩니다.
지구가 거대한 우주 속을 유영하는 동안 태양은 단 한 번도 뜬 적도, 진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방향’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을 뿐입니다.
허공을 보십시오. 낮이라 해서 더 밝아지지 않고 밤이라 해서 더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인연에도 물들지 않는 저 허공의 투명함이 바로 우리가 되찾아야 참마음 한바탕 이 진실 한 본래의 자유입니다.
이 사실에 밝지 못하니 선과 악의 칼날 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베며 살아갑니까. ‘선’이라는 깃발을 세우는 순간, 그 뒤편에는 필연적으로 ‘악’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상황에 따라 영웅이 살인자가 되고, 살인자가 영웅이 되는 이 모순된 세계에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기준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입니까.
그래서 선사님들 께서는 이 모든 이름과 모양이 생겨나기 이전, 그 ‘분별 이전의 자리’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흙 한 덩이가 불상이 되기도 하고 요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불상 앞에 엎드려 절하고 요강은 더럽다며 고개를 돌리지만, 흙의 눈으로 보면 그곳에는 거룩함도 더러움도 없습니다. 성인과 범부, 귀함과 천함이라는 이 무거운 이름표들을 다 떼어내고 나면, 우리를 억누르던 그 모든 차별은 한낱 부질없는 연기처럼 흩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언제나 ‘나’라는 감옥과 ‘선택’이라는 갈증에서 시작됩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 몸부림치고,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 울부짖으며, 싫어하는 것을 밀어내려 발버둥 치는 그 모든 몸짓이 실은 허공을 움켜쥐려는 헛된 수고임을 왜 모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묶여 있는 그 밧줄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임을 깨달으라는 사자후입니다.
파도가 아무리 거칠게 요동쳐도 바다의 심연은 흔들리지 않으며, 구름이 아무리 하늘을 가려도 허공은 상처 입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 또한 좋고 싫음의 파도가 일어나기 전 우리는 이미 완전한 자유 속에 있었습니다.
내마음 관세음
날마다 좋은날



멸성제(滅聖諦) 6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은 사실 ‘마음’이라는 거울 위에 잠시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그림자를 실재라 믿으며, 평생 그것을 붙잡기 위해 목을 축이지 못한 채 사막을 헤매는 이들처럼 살아갑니다.
‘좋다와 싫다’, ‘옳다와 그르다’라는 감옥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창살 틈으로 보이는 허상을 실재라 믿으며 고통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선원에서 사용하는 죽비 하나를 보십시오. 누군가는 그것을 거룩한 법구로 받들어 모시고, 누군가는 그저 흔한 관광지의 안마기로 여깁니다. 귀하고 천한 성질이 죽비 속에 본래부터 새겨져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죽비는 아무일 없습니다. 그 위에 ‘귀함’과 ‘천함’이라는 낙인을 찍어 우리를 갈등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우리의 분별심입니다.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도,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알레르기의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예쁘고 못남, 좋고 싫음은 꽃의 본질이 아니라, 갈증에 허덕이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입니다.
밝음과 어둠, 동쪽과 서쪽이라는 경계는 또 얼마나 견고한 집착입니까. 우리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실체라 믿지만, 사실 어둠이 물러나야 빛이 드러나고 서쪽이 있어야 동쪽이 성립됩니다.
지구가 거대한 우주 속을 유영하는 동안 태양은 단 한 번도 뜬 적도, 진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방향’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을 뿐입니다.
허공을 보십시오. 낮이라 해서 더 밝아지지 않고 밤이라 해서 더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인연에도 물들지 않는 저 허공의 투명함이 바로 우리가 되찾아야 참마음 한바탕 이 진실 한 본래의 자유입니다.
이 사실에 밝지 못하니 선과 악의 칼날 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베며 살아갑니까. ‘선’이라는 깃발을 세우는 순간, 그 뒤편에는 필연적으로 ‘악’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상황에 따라 영웅이 살인자가 되고, 살인자가 영웅이 되는 이 모순된 세계에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기준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입니까.
그래서 선사님들 께서는 이 모든 이름과 모양이 생겨나기 이전, 그 ‘분별 이전의 자리’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흙 한 덩이가 불상이 되기도 하고 요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불상 앞에 엎드려 절하고 요강은 더럽다며 고개를 돌리지만, 흙의 눈으로 보면 그곳에는 거룩함도 더러움도 없습니다. 성인과 범부, 귀함과 천함이라는 이 무거운 이름표들을 다 떼어내고 나면, 우리를 억누르던 그 모든 차별은 한낱 부질없는 연기처럼 흩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언제나 ‘나’라는 감옥과 ‘선택’이라는 갈증에서 시작됩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 몸부림치고,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 울부짖으며, 싫어하는 것을 밀어내려 발버둥 치는 그 모든 몸짓이 실은 허공을 움켜쥐려는 헛된 수고임을 왜 모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묶여 있는 그 밧줄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임을 깨달으라는 사자후입니다.
파도가 아무리 거칠게 요동쳐도 바다의 심연은 흔들리지 않으며, 구름이 아무리 하늘을 가려도 허공은 상처 입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 또한 좋고 싫음의 파도가 일어나기 전 우리는 이미 완전한 자유 속에 있었습니다.
내마음 관세음
날마다 좋은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