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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지 성관스님 작성일2026.05.05 조회300회 댓글0건본문
진정한 행복을 찾아서
멸성제(滅聖諦) 4
1. 내가 아닌 것들을 덜어내는 공부
<능가경>에 이르기를,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며, 모든 현상은 한 마음에서 드러난 것이다.”
또 이르기를,
“형상을 볼 때 곧 마음을 보는 것이나, 마음은 스스로를 마음이라 할 수 없기에
반드시 현상을 의지하여 드러난다.”
이 말씀은 깊으면서도, 우리의 삶과 바로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고 할 때,
그 ‘아는 대상’은 분명하지만
정작 ‘아는 나’는 붙잡히지 않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
“이 안경이 나다”라고 말하지 않듯이,
신발을 신고 있으면서
“이 신발이 나다”라고 말하지 않듯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며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지 않듯이,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몸 또한, 생각 또한
내가 아니라
잠시 걸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몸은 변하고,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변하는 그것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법정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을 내 것이라 여기고 집착합니다.
재산도, 명예도, 관계도, 심지어는
내 몸과 감정까지도
‘내 것’이라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우리가 진정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모든 것은
본래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길을 가다 잠시 빌려 쓴 우산처럼,
비가 그치면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 역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떠나갑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말했습니다.
“萬般將不去 唯有業隨身”
(만반장불거 유유업수신)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오직 업만이 몸을 따른다.”
이 사실에 밝아지면,
우리는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붙잡을 것도 줄어들고,
놓지 못해 괴로워할 일도 줄어듭니다.
<능가경>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형상이 공함을 알면,
일어남도 곧 일어남이 아니다.”
이 뜻을 깊이 체득하게 되면
수행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하루를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이
그대로 도(道)가 됩니다.
애써 무엇을 더 이루려 하지 않아도,
이미 그 자리에서
부처의 씨앗은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무언가를 더 얻는 일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닌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는 일입니다.
그 덜어냄 속에서
비로소 가볍고 맑은 본래의 자리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더 붙잡을 것도,
더 이룰 것도,
사실은
이미 충분했다는 것을.






멸성제(滅聖諦) 4
1. 내가 아닌 것들을 덜어내는 공부
<능가경>에 이르기를,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며, 모든 현상은 한 마음에서 드러난 것이다.”
또 이르기를,
“형상을 볼 때 곧 마음을 보는 것이나, 마음은 스스로를 마음이라 할 수 없기에
반드시 현상을 의지하여 드러난다.”
이 말씀은 깊으면서도, 우리의 삶과 바로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고 할 때,
그 ‘아는 대상’은 분명하지만
정작 ‘아는 나’는 붙잡히지 않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
“이 안경이 나다”라고 말하지 않듯이,
신발을 신고 있으면서
“이 신발이 나다”라고 말하지 않듯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며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지 않듯이,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몸 또한, 생각 또한
내가 아니라
잠시 걸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몸은 변하고,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변하는 그것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법정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을 내 것이라 여기고 집착합니다.
재산도, 명예도, 관계도, 심지어는
내 몸과 감정까지도
‘내 것’이라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우리가 진정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모든 것은
본래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길을 가다 잠시 빌려 쓴 우산처럼,
비가 그치면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 역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떠나갑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말했습니다.
“萬般將不去 唯有業隨身”
(만반장불거 유유업수신)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오직 업만이 몸을 따른다.”
이 사실에 밝아지면,
우리는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붙잡을 것도 줄어들고,
놓지 못해 괴로워할 일도 줄어듭니다.
<능가경>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형상이 공함을 알면,
일어남도 곧 일어남이 아니다.”
이 뜻을 깊이 체득하게 되면
수행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하루를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이
그대로 도(道)가 됩니다.
애써 무엇을 더 이루려 하지 않아도,
이미 그 자리에서
부처의 씨앗은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무언가를 더 얻는 일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닌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는 일입니다.
그 덜어냄 속에서
비로소 가볍고 맑은 본래의 자리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더 붙잡을 것도,
더 이룰 것도,
사실은
이미 충분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