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신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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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백제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다시 지었으며, 고종 13년(1876년)에 보련화상이 명성황후의 후원으로 지은 것을 1906년과 1946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의 끝을 살짝 올려 우아한 멋을 냈다. 중앙 칸에는 사분합 빗살문을, 좌우 칸에는 사분합 띠살문을 동일한 간격으로 달았다.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1978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자연석을 쌓아 만든 기단 위에 서향으로 서 있다. 정면 3칸은 같은 간격으로 나뉘어 있고, 가운뎃칸에는 4분합(分閤) 빗살문을, 양 옆칸에는 4분합 띠살문을 달았으며, 3칸 모두 문인방 위에 교창(交窓 : 창문 위에 두는 낮은 창)을 두었다. 측면과 뒷면은 문을 두지 않은 판장벽(板張壁)이다.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뒤쪽에 불단을 놓아 삼존불(三尊佛)을 안치하였으며, 불상 위에는 닫집[唐家]을 설치하였다. 공포(栱包)는 포작수(包作數)가 1출목(一出目)이며 첨차 끝 쇠서 위에 연꽃 조각을 장식하였다. 내부 가구(架構)는 불단 좌우의 고주(高柱)와 앞뒤의 평주(平柱)를 대들보로 연결하고 이 위에 충량(衝樑)을 놓았다. 천장은 우물천장을 한복판에 가설하고 그 둘레에 빗천장[傾斜天障]을 만들었다. 이 건물은 고려 성종 3년(984)에 여철화상(如哲和尙)이 중수한 적이 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1906년에 일봉화상(日峰和尙)이 다시 지은 것을 1946년에 만허화상(滿虛和尙)이 중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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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 대웅전 편액
대웅전 편액은 구한말 문신,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의 글씨다. 글씨체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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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 대웅전 불단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으며, 오른쪽(좌협시)에는 관세음보살, 왼쪽(우협시)에는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는 아미타 삼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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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 대웅전 진영
대웅전 불단 오른쪽에는 중흥조 도선, 창건주 보덕, 중흥조 무학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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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 대웅전 신중도(좌), 노사나괘불탱(우)
대웅전 왼쪽 벽에는 제석천을 비롯해 불법과 절을 수호하는 온갖 수호신들을 모아 놓은 [신중도]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1644년 인조 때 조성한 노사나괘불탱(국보 제299호)의 축소 사진본이 걸려 있다. 괘불탱의 원본은 길이 11m, 너비 8m의 큰 사이즈로 평소에 보기 힘들기 때문에 축소 사진본을 걸어놓은 것이다. 통상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영산회상도에 보통 삼불을 그리는데, 이 탱화에는 독특하게 노사나불 한 분만 단독상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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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국보 제 299호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할 때 법당 앞마당에 걸어 놓고 예불를 드리는 대형 불화이다.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은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보살과 10대 제자 및 사천왕 등을 그렸으며,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노사나불이 영취산에서 단독으로 중생에게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길이 11.18m, 폭 6.88m로 조선 인조 22년(1644년)에 제작되었다. 전각에는 원본이 아닌 복사본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