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신원사
-
공주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명성황후 기도처로 유명한, 국내 최대 규모의 산신각인 <중악단>이 있는 계룡산 신원사다. 고종 때 묘향산과 지리산 산신각을 각각 상악단과 하악단이라 하고 두 산 사이에 있는 계룡산 산신각을 중악단이라 한 것이다. 오늘날 유일하게 중악단만이 존재하고 있어 대한민국 최고의 산신도량이다.1651년(효종 2년)에 철거되었다가 1879년(고종 16년)에 명성황후가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양식을 그대로 축소하여 만든 건물의 안에는 산신도가 모셔져 있다.한국의 명산 계룡산에는 산을 지키는 네 개의 사찰이 있는데, 동쪽 동학사, 서쪽 갑사, 북쪽 구룡사, 남쪽 신원사가 있다. 공주 신원사는 동학사, 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이다.
-
신원사 중악단과 신원사 옛 절터
신원사 중악단 앞의 주차장 자리는 원래는 밭이었고, 신원사의 옛 절터였으며, 중악단이 있는 자리는 원래 대웅전이 있던 자리였다. 고종이 계룡산의 기(氣)가 모인 자리에 중악단을 모시고 조금 비켜서 대웅전을 옮겨 사찰을 지으면 어떻겠냐는 진언에 의해서 사찰을 조금 옆으로 비켜서 짓게 되었다.2023년 중하대중사님의 작사로 명성황후 추모곡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
신원사 중악단 배치도
중악단은 명성황후의 간청과 고종의 명에 의해 지어진 국내 최대 규모의 산신각이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 국가적으로 지낸 제는 북쪽의 묘향산 상악단, 중앙의 계룡산 중악단, 남쪽의 지리산 하악단에서 모셨는데, 이 중에서 유일하게 계룡산 중악단만 남아 있으며, 매년 4월 중악단 산신대제를 지낸다. 중악단은 궁궐을 연상케 하는 구조로 전체적으로 네모난 담장을 둘렀고,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단청과 공포로 장식했다.
-
신원사 중악단 대문간채
중악단의 대문간채와 중문간채는 삼문형식으로 가운데 문은 임금만 다닐 수 있는 어칸문으로 지붕도 높게 지었으며, 좌우의 문은 관료들이 출입하는 문이며, 지붕도 평평하게 지었다.
-
신원사 중악단 대문간채 편액, 중악단 산신각
-
중악단 대문간채 뒷쪽 편액, 선열법희
대문간채 뒷쪽 편액인 '선열법희'는 '수행의 즐거움과 부처의 가르침을 듣는 기쁨'이란 뜻이다.
-
신원사 중악단 대문간채 안쪽 편액, 낙은재
대문간채 안쪽 편액인 '낙은재'는 '은둔하며 즐겁게 사는 집'이란 뜻이다.가늘고 굵은 획을 조화롭게 대비시킨 글씨로 흥선대원군의 글씨인데, 청송에 있는 대원군 편액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대원군은 의금부도사를 지낸 아끼던 신하 배학순이 1897년 고향 청송으로 낙향하자 그의 호 '낙은'을 딴 집 이름을 써 줬고, 배학순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학당 이름으로 내걸었다. 서로 원수지간인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편액은 다소 아이러니다. 왼쪽 끝에 *석파궁(石坡宮)이란 관지가 있다. *석파 : 흥선대원군의 호
-
신원사 중악단 대문간채 안쪽 행랑채
대문간채 양쪽에 덧댄 방 중에서 오른쪽 방은 중악단을 관리하는 스님의 처소로서 일종의 향각(香閣)이다. 명성황후가 중악단 재건 후, 여러차례 기도를 하러 올때 기거했던 방이다. 명성황후는 중악단을 짓기 8년전인 1871년에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고종은 실권없는 왕이었고, 대원군은 궁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이에 중악단을 짓고 간절한 마음으로 영험한 계룡산 산신에게 기도를 한 것이며, 이에 1874년 순종을 낳는 경사를 맞게 되었다.
-
신원사 중악단 중문간채
대문간채에서 중문간채를 지나 중악단에 이르는 마당에는 임금과 왕비만 걷는 어도(御道), 신도(神道)를 냈고, 중악단으로 올라서는 계단 역시 가운데에 따로 조성하였다.
-
신원사 중악단 중문간채 편액, 계룡산신제일도량
중문간채 편액인 '계룡산신제일도량'은 '계룡산 산신을 모시는 으뜸가는 절'이란 뜻이다.
-
신원사 중악단 중문간채 뒷면 편액, 제대산왕강림도량
중문간채 뒷면 편액인 '제대산왕강림도량'은 '산에 깃든 모든 큰 산왕님들이 강림하는 곳'이란 뜻이다.
-
신원사 중악단 중문간채 어칸문
중악단 중문간채의 어칸문(御間門)에는 색채가 거의 날아간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한쪽은 익선관을 쓰고 긴 창을 들고 있는 서방광목천왕이며, 다른 한쪽은 비파를 들고 있는 북방다문천왕이다. 대문간채의 문에도 그림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동방지국천왕과 남방증장천왕으로 추정된다.
-
신원사 중악단
[공주 계룡산 중악단(公州 鷄龍山 中嶽壇)은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충청남도 공주시 신원사 내에 있다.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93호로 승격되었다
중악단은 1.5m의 높은 돌기단 위에 지어진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묘향산의 상악단은 한국전쟁시 소실되었고, 지리산의 하악단은 소재를 알 수 없으나, 계룡산의 중악단은 잘 보존되어 나라에서 산신제를 지냈던 유일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계룡산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태조 3년(1394년) 부터이며,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계룡산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이라는 단을 쌓은 후 제사를 올린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성계의 꿈이야기
이성계가 백일기도 회향후 나무토박 세개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해몽한 보살이 임금왕자를 그려주며 임금이 될 꿈이라 했다. 이에 이성계는 소문날까 보살을 살해하고 산신제를 지내게 되었으며 고종황제 이전에는 여산신이었다는 설화가 있다.
-
신원사 중악단 편액
중악단 편액은 충청도 암행어사였고, 신원사 영원전의 편액을 썼던 문신 이중하의 글씨이다. 이중하는 중악단을 세울 때, 국가로부터 백지수표 500장(공명첩)을 받아 왔는데, 이때 강력한 후원자가 명성황후였다.촛불을 켜지 못할 정도로 폐허가 된 중악단을 재건한 이중하에게 지역 주민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암행어사 이중하 영세불망비’를 세워주었다.
-
신원사 중악단 처마 공포(아래)
중악단의 처마는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단청과 공포로 장식되어 있다.
-
신원사 중악단 담장과 아래 수복강령
중악단 사면의 담장은 화려하여 꽃담이라 부르며, 수복강령을 기원하는 글자를 넣어 장식하였다. 또한 담장은 만약의 화재가 발생해도 중악단을 지키기 위한 방화벽의 역할도 하였다.
-
신원사 중악단 산신탱
중악단에는 계룡산 산신탱을 모시고 있으며, 앞에는 '계룡산신위'라는 위패가 있다. 일반적인 탱화에는 산신과 호랑이가 있는데, 중악단의 탱화에는 호랑이 대신 물속에 사는 해태를 그려 넣어 계룡산의 산불을 예방하였다고 한다.
-
신원사 중악단 잡상
중악단의 잡상은 지붕 위에 7개의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을 한 것으로 절에서는 신장님을 뜻한다. 경복궁에 11개, 신원사 중악단에 7개, 창경궁에 5개가 있는데, 현대 건축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청와대 지붕위에 잡상이 있다. 잡상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 자금성에는 11개의 잡상이 있다.